진주성은

삼국시대 거열성(居列城), 고려시대 촉석성 (矗石城)으로

 불렀던 것으로 조선시대에 이르러 진주성으로 개칭되었다.

석축된 성의 둘레가 약 1,760m(4,359척), 높이는 약 5~8m(15척)이며,

성 안에 우물과 샘이 각각 3개 있고, 군창(軍倉)이 있었다고 한다.

이보다 앞선 동국여지승람에 실린 하륜(河崙)(1347~1416년)의 성문기(城門記)에 보면

성이 옛터만 남아 언제 쌓은 것인지 알 수 없는데, 왜구의 침입이 빈번하여

고려 우왕 5년(1379년)에 진주목사 김중광에게 석축하게 하였다고 한다.

 이 때 성의 둘레는 800보이고, 성의 높이는 세길을 넘으며

의정문(서쪽), 지제문(북쪽), 예화문 (남쪽)이 있고,

 성밖은 서쪽으로 청천(靑川)이 남쪽에는 긴강(남강)이 흘렀으며,

북쪽에는 못이 있는데 성과 못 사이에는 참호를 팠다고 했다. (출처 : 한국관광공사)

북장대

 

촉석루  :  우리나라 3대누각 중 하나로 진주성위에 장엄하게 솟아 있다.

              진주성을 휘감아도는 남강과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누각 아래 강변에는 의암이 있다.

 

김시민장군 전공비와 촉석정충단비

 

 

 

호국의종

 

 

 

임진대첨계산 순의단 : 임진년(1592년)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의 진주대첩을 높이 받들고 계사년(1593년)에 순국하신 7만민.관.군의 충혼을 위령하기 위하여

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 1987년에 극란 극복의 표상으로 건립하였다.

 

 

이처럼 고려말에 왜구방어의 보루로 고쳐 쌓은 이 성은 조선 선조 25년(1592)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호남으로 진출하려는 왜적을 막는 관문이 되었다.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제1차 진주성싸움을 드는 것은 3,800여명의 군사로 10배에 가까운 왜적을 물리쳤을 뿐 아니라, 이 성을 지킴으로써 곡창지대인 호남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. 1593년 제2차 진주성싸움에는 민.관.군 7만여명이 왜군 12만여명을 맞아 11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모두 순의하였고, 이 때 논개가 적장을 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충절을 다한 곳이기도 하다. 성내는 촉석루, 김시민 전성각적비, 의기사, 서장대, 북장대, 창열사, 국립진주박물관, 호국사, 야외공연장 등이 있다.

촉석문

 

의암 : 진주남강의 푸른물결위에 떠있는 의암은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순절한곳으로 촉석루를 떠 받치는 벼랑만큼이나 크로 당당하게 느껴진다.

 

 

 

 

 

* 의기사(義妓祠)
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호
의기사는 임진왜란 당시(1593년)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의 영정과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. 논개는 진주성이 함락되자 성민과 나라의 원한을 갚기 위하여 왜장을 촉석루 아래 의암으로 유인한 후 함께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하였다. 의기사는 그 의로운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영조 16년(1740년)에 경상우 병사 남덕하(1688~1744년)가 창건한 이래 두 차례에 걸쳐 중수하였으며, 지금의 건물은 1956년 의기창열회가 시민의 성금을 모아 중건한 것이다. 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서장대

 

창열사

 

포루

 

진주 박물관 : 진주성이 지니는 역사적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 설립된 임진왜란을 주제로하는 임진왜란박물관이다.

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 한국의 대표적인 건축가 김수근의 작품으로 공간조영의 맥을 잘 보여주는 걸작이다.

 

 

 

 

 

김시민 장군동상 : 충무공 김시민장군의 호국충절 정신을 계승하기위해 건립한 진주성 수호상으로 2000년 1월1일 제막하였다.

 

공북문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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